일상의 기록2013. 1. 2. 17:19

 

 

 

윳놀이에서 계속 개만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푹신푹신한 곳을 좋아하는 코코가 아예 윳판 이불 위에 와서 누워버렸네...

Posted by 파자마샘
일상의 기록2012. 10. 21. 08:32

[Why] [김윤덕의 사람人] 女의사 조병국 "처음엔 피 묻은 고기인가 싶었는데…"

 

'버려진 아이들' 주치의로 50년간 살아온 '할머니 의사' 조병국

버려진 아이라면 슬프지만, 발견된 아이라 하면 참 희망적이죠

할머니 주치의, 청진기를 다시 들다 - 6만명인지, 7만명인지

한 줌 숨 붙어 있으면 살려내는 일로 50년을 하루같이…그 생명 얼마나 귀한지

 

진료실 문틈으로 까만 머리 하나가 빼꼼 들어왔다 사라졌다. 이내 다시 얼굴을 내밀더니 그이에게로 냅다 달려간다. "원장님~" "진수 왔구나." 더러 주사를 놓는 바람에 그이만 보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도 있지만 그때뿐이다. 아이들이 겁낼까봐 흰 가운도 입지 않는 그이는 몸과 마음 모두 상처투성이인 아이들에게 산처럼 크고 바다처럼 깊은 품이다.

 

그새 50년이 흘렀다. 서울시립아동병원과 홀트아동병원에서 '버려진 아이들'의 주치의로 살아온 세월이다. 이 고되고 험한 일을 놓을 수 없었던 건 아이들과 함께 겪은 '작은 기적들' 때문이었다고 조병국(79) 박사는 말했다. "나라고 왜 떠나고 싶지 않았겠어요. 사람인걸. 그런데요, 참 희한하게도 그때마다 과학 하는 사람의 머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지요."

 

조병국은 올해 삼성생명 공익재단의 '비추미 여성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정년퇴임 한 지 20년이 돼 가지만 변변한 후임 의사가 없어 아이들 곁을 지켜온 그였다. 홀트일산복지타운으로 조 박사를 만나러 가기 전 그의 50년 의료 일기인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삼성출판사)를 찾아 읽었다. '기적'이 그 안에 있었다.

 

 

◇청진기를 다시 들다

 

―비추미대상에 파라다이스상,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올해 상을 많이 받으시네요.

 

"소아과 의사가 아이들 돌보는 건 당연한데, 부모 없는 아이들 봐줬다고 칭찬하시나 봐요.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니 그런 것도 같고(웃음). 감사하지요."

 

―3년 전에 쓰신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를 가슴으로 읽었습니다.

 

"고마워요. 책을 펴내면서는 이런 얘기를 누가 믿어주겠나, 60~70년대 어려웠던 시절 고아들과 입양아들 고생했던 이야기를 요즘 사람들이 이해할까 싶었는데 마음에 와 닿았다니 감사해요. 돌아가신 박완서(소설가) 선생은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그분이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눈시울을 적셨다고 하더군요. 나보다 두 살 위이니 같은 세대라 그러셨을 거예요."

 

―자서전으로 쓰지 않고 오로지 50년간 만나고 헤어진 아이들의 이야기로 채운 까닭이 있습니까.

 

"내 이야기란 게 뭐 있어요. 그 생명들이 소중하지. 나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어요.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는 일로, 한 줌이라도 숨이 붙어 있으면 살려내는 일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라요. 어떤 아이는 태반과 탯줄이 달린 채 피로 얼룩진 속바지에 싸여서 들어왔다고요. 처음엔 푸줏간 남자가 직원 식당으로 고기를 배달하는 건 줄 알았는데, 경찰이었죠. 핏덩이를 보고 처음엔 놀라 자빠졌는데 하도 많이 보니까…. 아이도 아이지만 자궁 수축이 되기도 전 출혈이 멈추지 않는 몸을 끌고 어디론가 도망쳤을 산모는 살아 있을까 걱정을 하고 그랬지요."

 

―50년간 6만명의 아이를 진찰하셨다고요?

 

"6만명인지, 7만명인지는 세어보지 않아 나도 잘 몰라요. 하루에 적게 보면 80명, 소아과 외래에 하루 223명이 온 게 최대였으니까. 100명 이상은 청진을 못해요. 귀가 아파서. 1972년만 해도 시립아동병원에 입원했던 3세 미만 아이들이 2300명이나 되었지요."

 

―유난히 버려진 아이들에게 질병이 많은 걸까요?

 

"추운 겨울에, 그것도 거리에 버려졌으니 당연히 그렇지요. 몇끼를 굶었는지도 모르잖아요. 보육원에 들어와도 일손이 모자라니 엄마처럼 일일이 가슴에 안고 우유를 먹이지 못하고 기저귀를 머리 옆에 괴어놓고 젖병을 물린다고요. 고개만 살짝 움직여도 젖병이 빠지니 흘러나온 우유는 기저귀에 다 스며들고 아기는 영양실조 되고요. 거기다 전염병까지 돌면…. 아이들을 쑥쑥 자라게 하는 건 쌀과 우유가 아니라 엄마의 다정한 어루만짐과 따뜻한 눈빛이에요."

 

 

―끝내 소생하지 못한 아이도 많았다고요.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70년대에는 그랬어요. 힘없이 사그라지는 생명을 지켜보며 사망진단서를 써야 할 때 나의 무능함을 탓했지요. 세상 누구보다 불행한 출생을 경험한 아이들인데 마지막 가는 길도 창호지 몇장에 싸여…. 내 손으로 서명한 사망진단서의 이름들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지금도 기도합니다."

 

―아이의 입양 서류에는 '~에 버려졌음'이 아니라 '~에서 발견되었음'이라고 기록하신다 들었습니다.

 

"'버려진 아이'는 슬프지만 '발견된 아이'는 희망적이잖아요. 미국 사람들한테 배웠어요. 그전만 해도 우리는 정직하게 '기아(棄兒)'라고 썼는데, 나중에 장성한 아이들이 그 단어를 보고 다시 상처를 받는다는 거예요. 제발 '어밴던(abandon;버리다)'이란 단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고 해서 80년대부터 고쳐 쓰기 시작했지요."

 

―정년퇴임은 1993년에 하셨는데 왜 여태 홀트에 남아 계십니까.

 

"후임 의사가 오긴 했는데 박봉에 노동 강도가 세니 몇 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나는 퇴직한 뒤 아들 딸 있는 캐나다로 가서 살려고 준비하는데 홀트에서 급히 전화가 걸려 왔지요. 다시 일해줄 수 없느냐고. 그래서 15년을 '전(前) 원장'이란 직함으로 더 일하다가 어깨가 너무 아파서 2008년에 완전히 청진기를 놓은 거예요. 그때 책을 썼고요. 그런데 홀트에서 또 전화가 옵디다. 별일 없으면 일산복지타운에 있는 장애아들을 봐줄 수 없느냐고. 딱 4개월만 도와주기로 하고 온 게 벌써 만 3년이에요. 징글징글한 인연이지요(웃음)."

 

7남매의 장녀, 전쟁 - 일찍 죽은 여동생 둘과 전쟁 고아들 보면서 다짐
"치료하는 능력을 기르자" 아버지가 의대 원서 찢자 몰래 도장 파서 입학

 

영혼의 소리에 울다 - 중증장애아인 현군이가 노래 부르면 울음바다
어떻게 더 많이 배우고 더 가진 이를 위로하는지… 하나님, 참 공평하지요

 

아이들이 희망이다 - 희망이라는 깜짝 선물
받지못하고 생을 포기하면 얼마나 억울한가요

 

母性이라는 마법 - 입양, 어렵지 않아요
아이의 닫힌 마음을 여는 마법은 누구에게나 있죠

 

―일산복지타운은 전에 일하셨던 홀트아동병원과는 다른 곳인가 봅니다.

 

"홀트를 해외 입양만 보내는 곳으로 아는 분들이 많은데, 장애인 치료와 복지에도 오랫동안 헌신해 왔지요. 일산복지타운은 장애아라 어디에도 입양되지 못한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로 시작했어요. 창립자인 해리 홀트는 장애인 아파트를 짓는 게 꿈이었는데, 딸(말리 홀트)이 그 사명을 완수하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영혼의 소리'에 울다

 

정신 지체와 발달 장애로 천방지축 날뛰던 현군이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영혼의 소리로'의 단원이 된 후부터였다. 홀트일산복지타운의 중증 장애인들로 구성된 합창단. 일주일에 세 번 합창단 연습이 있는 날에는 누구보다 침착하게 집중력을 발휘했다. 악보도 못 보고 글도 못 읽지만 아이는 지휘자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박자와 음정을 곧잘 따라 했고 마침내 합창단의 솔로가 되었다.

 

―현군이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 객석이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얘기가 책에 나옵니다.

 

"목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현군이가 어떻게 저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걸까, 거칠고 척박한 마음들에서 어떻게 이토록 맑은 눈물을 끌어낼 수 있는 걸까 생각했지요. 하나님, 참 공평하지요?(웃음)"

 

―현군이는 지금 어떤 일을 합니까?

 

"홀트특수고등학교를 나와 전문대 코스를 밟고 있지요. 전기 부품 만드는 기술자이지만 여전히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한 아이랍니다."

 

―뇌성마비였던 영수가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재활의학 전문의가 되어 박사님을 찾아온 이야기도 아름다웠습니다.

 

"자신처럼 사지를 마음껏 움직일 수 없는 사람, 특히 아이들을 치료하고 싶어 했지요. 영수는 내게 또 한 번 기적 같은 소식을 전해주었어요. 아내가 불임이라 첫아이를 입양했는데, 그러고 3년 뒤 임신을 한 거예요. 두 딸을 얼마나 잘 키우는지. 둘째 딸 이름이 뭔지 아세요? 말리 홀트와 내 이름을 딴 '말리 병국'이랍니다. 하하하!"

 

―50년간 아이들을 만나면서 '모성(母性)이 무엇일까' 고민했다고 쓰셨더군요.

 

"열 달 동안 피와 살을 함께 나누던 생명을 세상에 내놓는 즉시 버리는 엄마도 보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엄마도 보았지요. 엄마가 되는 데 임신과 출산 경험이 반드시 필요할까요? 아이를 품에 안고 눈을 맞추고 똥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모성애는 시작되지요."

 

―그런 위대한 모성들을 수없이 만나셨지요? 그들이 꼭 미국이나 스웨덴이 아니라 한국에도 많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그럼요. 그들이 또 대단한 지식인이나 부자도 아니에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죠. 한 아이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고,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를 찾아줄 마법 같은 힘은 누구에게나 있답니다."

 

母性이라는 마법의 힘

 

―그래도 입양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박사님 역시 '장애아는 첫째를 건강하게 길러본 경험이 있는 부모가 데려가는 게 좋다'고 충고하셨고요.

 

"그저 식구 수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뿐이라고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분들이 입양했으면 좋겠어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음의 상처는 몸의 상처보다 더디 낫는다는 사실이죠. 무한한 포용과 인내가 필요해요. 입양 부모는 아이에게 슬픔을 치유하는 안식처이자 세상으로 나갈 용기를 주는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지요."

 

―파양하는 경우, 또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처럼 양부모의 학대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이죠. 그래서 요즘엔 해외 입양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어요. 입양된 아이 중에도 왜 자기를 타국으로 보냈느냐며 원망하는 경우가 있고요. 그런데 아동 학대는 친부모들에게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차라리 보육원에 그대로 놔두지 왜 자기를 해외로 보냈느냐고 원망하는 아이들은 당시의 보육원 형편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아 그렇게 말하지요. 나는 조금 부족해도 멘토, 롤모델이 돼줄 수 있는 양부모,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는 가족이 보육원보다 훨씬 좋다는 입장입니다."

 

―해외 입양 전면 금지령이 내려졌던 1989년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쓰셨습니다.

 

"곧 없던 일이 돼버렸지만 지난 몇십년간 내가 한 일이 고작 고아 수출이었나 하는 생각에 상처가 되더라고요. 우리는 그저 집 없고 병든 아이들을 위해 따뜻한 가정과 부모를 찾아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 부모가 국내에 없으니 해외로 눈을 돌렸던 것뿐인데. "

 

―지금도 아이들이 원장님을 찾아오지요?

 

"그럼요. 처음엔 자기가 자랐던 고아원에 갔다가 자기를 마지막으로 진료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는 'Cho'(조)를 찾아 여기까지 오지요. 내가 '너 기저귀 차던 시절 고추까지 만져봤어' 하면 날 부둥켜안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섯 번 이상 내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으면 '당신이 한국의 내 엄마'라며 자랑스러워하지요."

 

―자기를 버린 부모를 원망하진 않습니까.

 

"그들이 한국을 찾는 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서이지 부모를 찾아 원망하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자기를 버려야만 했을 때 엄마가 외롭게 겪었을 고통을 안쓰러워하지요. 이렇게 잘 컸으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하러 왔는데 부모는 차마 자식을 볼 면목이 없어 나타나지 않는 거고. 열의 아홉이 그렇게 얘기해요. 대견하지요."

 

 

전쟁, 그리고 국제 거지

 

1933년 평양에서 태어난 조병국이 연세대 의대를 나와 부모 없는 아이들, 병든 아이들의 주치의가 된 건 그의 집안 내력과도 관련 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 외할아버지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생업을 뒷바라지한 자선사업가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선교사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나와 교직에 몸담았다. 7남매의 장녀인 그가 의사가 돼야겠다고 결심한 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은 여동생들, 그리고 전쟁 때문이었다. "동생 하나는 코피가 멈추지 않아 죽었고, 또 다른 동생은 홍역에 폐렴이 겹쳐 세상을 떠났어요. 어머니가 관 뚜껑을 만들어 덮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피란길에 본 수많은 아이, 죽은 엄마의 등에 업혀 울고 팔이 잘린 채 기찻길에 널브러진 아이들을 보면서 맏이인 나는 부모 없이도 동생들을 돌볼 수 있는 능력, 아픈 아이들을 치료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 같아요."

 

―'조병국'이란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기독교 집안인 데다 남녀 차별 의식이 없던 아버지가 딸들에게도 돌림자를 주셨어요. 빛날 병에 국화 국. 천생 남자 이름이니 호적에 사내아이로 잘못 기재돼 있는 걸 네 살 때 발견하고 다시 고쳤답니다."

 

―아버지께서 의대 진학을 반대하셨다고요.

 

"영문과나 약대가 여자에게 더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의대 입학원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시길래 아버지 도장을 몰래 판 뒤 내 마음대로 입학원서를 다시 만들어 제출했어요. 공문서 위조죠(웃음). 지금도 생각하며 웃는 일은 면접시험이에요. 의과대학에 왜 들어오려고 하느냐고 묻는데 내가 '유아사망률을 낮추고 싶어서'라고 거창하게 대답했다는 것 아닙니까."

 

―대학 졸업 후 실습을 극빈자 아이들을 돌보는 동부시립병원과 홀트에서 하셨더군요.

 

"아이들을 만나면 에너지가 불쑥불쑥 솟았어요. 서울시립아동병원에 정식으로 취직하기 전까지도 홀트에서 토요일마다 봉사를 했지요. 숙명이었나 봅니다."

 

―시립아동병원 시절에는 '국제 거지'란 별명을 얻으셨다고요.

 

"잘해보겠다는 열정이 뻗쳤던 거죠. 남자 열하고 나 하나를 안 바꾸겠다고 원장이 말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어요. 독일 노르웨이 미국 등지에다 아이들 수술과 치료에 필요한 의료 기부를 받아내겠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더니 그런 별명이…."

 

―시립병원 시절 월급이 100만원이 안 됐다고 하더군요. 홀트아동병원 원장 시절에도 300만원 남짓이었다고 하고.

 

"국물에 멸치 한 마리라도 걸리면 그걸 숨겨뒀다가 먹을 만큼 병원 아이들 급식이 열악했어요. 그래도 우리 집 애들은 계란에 밥을 비벼 먹을 정도는 되니, 그게 마음에 걸려 월급 타면 계란 100개씩 사서 병원에 갖다 주었지요."

 

―부군은 연세대 의대 동창이셨지요?

 

"이비인후과 전공인데 내가 하는 일을 적극 도와줬어요. 우리 애들이 지능이 낮아 옷핀, 단추, 동전 같은 걸 막 삼키잖아요. 그러면 남편이 일하는 한양대 병원으로 데려가요. 외래환자들 진료가 얼추 끝나는 오후 4시쯤에. 둘이 함께 정년퇴임 하면 무의촌에 가서 진료하며 여생을 보내자고 약속했는데 그이가 너무 빨리 세상을 버렸지요."

 

―3남매 숙제 한번 못 봐줄 만큼 바쁜 엄마였는데 자녀는 불평하지 않았나요?

 

"건강했으니까 그걸로 됐지요. 주말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빵도 구워주고, 당직하는 날엔 아이들 데리고 병원에 갔어요. 입원한 아이들에게 밥도 먹여주게 하고, 엄마가 어떤 일을 하는지 보게 해주려고. 유명한 인물이 되지는 못했지만 어려운 사람 보면 도울 줄 알고, 잘난 척하지 않으니 그걸로 됐지요."

 

'희망'이라는 이름의 깜짝 선물

 

'얼마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에 갓 태어난 제 살붙이를 내버려야만 했을까. 아이를 가진 걸 원망하고 후회했을 어미의 자궁에서 열 달을 지내다가 내쫓기듯 태어나 버려진 아이가 감당했을 충격과 아픔은 얼마나 컸을까. 그래도 버려진 아이라고 손가락질하기엔 아직 이르다. 고아로 자랐어도 당당하게 삶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다. 그들 하나하나가 바로 낮은 곳에서 피어난 희망이고 기적이다….'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중에서〉

 

―책에 '우리가 간절히 원할 때 신은 그 기도에 답한다'고 쓰셨습니다.

 

"의학이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 의사들은 기적을 목격하죠. 깨어날 수 없는 사람이 깨어나고,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이 살아나는. 나는 그 기적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 버려지고 아픈 아이들이 모인 곳에 더 자주 일어나기를 바랐어요."

 

―신(神)의 존재를 믿으시지요?

 

"그 죄없이 죽어간 생명들이 다 어디에 가 있겠어요. 천국에 가서 천사처럼 평화롭게 살아야 공평하잖아요."

 

―신이란 결국 인간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존재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내 팔십 생애를 돌아봐도 참 희한해요. 나는 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을까, 우리 외할아버지는 왜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와 글을 가르치고 시집까지 보내셨을까,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하며 원서를 찢어버렸는데 나는 왜 굳이 의과대학에 들어간 걸까, (서울시립아동병원 시절)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나를 신은 왜 살려주었을까…. 이제 와 돌아보니 그 모든 것이 나 혼자, 내가 원해서 이뤄진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경제적 어려움으로 좌절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학교수 부인이 결혼이 파경을 맞자 두 살배기 아들과 함께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뛰어들었어요. 엄마는 죽고 아이는 생명을 건졌으나 두 다리를 잃었지요. 장애가 있으면 입양도 어려워지니 내가 생모를 원망했다고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요. 미국에서 의족과 의수 같은 장애인 보조기구를 처방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부부가 이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연락해온 겁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그 아이가 롤러스케이트 타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내왔는데 너무나 감사해서 내가 사진에 얼굴을 묻고 울었어요. 실오라기만큼의 희망도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지만 정말로 눈 크게 뜨고 찾아본 걸까요. 희망은 삶의 어느 모퉁이에선가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요. 그 깜짝 선물을 받지 못하고 생을 포기한다면 얼마나 억울한가요."

 

―내년이 팔순이십니다.

 

"어느 입양아의 편지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지요. '지금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할 때.' 요즘 내가 딱 그 심정이에요. 할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간호사들, 이름 모를 봉사자들에게 절을 하고 싶어요. 죽으려고 뛰어내리려는 순간 누가 곁에서 외마디 소리만 질러줘도 그 결심 바꿀 수 있지요. 그래서 이웃이, 친구가 필요한 거예요. 이 순간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세요."

 

출처: 조선일보 2012.10.21

Posted by 파자마샘
일상의 기록2012. 3. 26. 14:07

 

 

 

세계은행 차기 총재로 지명된 한국계 미국인 김용 Dartmouth College 총장이

 

대학 축제에 깜짝 등장해 화려한 댄스와 함께 수준급의 랩을 선보였다.

 

YouTube에 지난 해 3월 11일 올라온 "Time of my life-Dartmmouth Idol Finals, 2011"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미국 Ivy League에 속하는 Dartmouth College 의 축제 상황을 담고 있다.

 

동영상에서는 학생들이 영화 ‘Dirty Dancing’의 OST로 사용된 음악인 ‘time of my life’를 부르며

 

춤을 추는 중간에 김용 총장이 '깜짝 등장'한다. 김 총장은 흰색 재킷을 입고

 

그룹 블랙아이드 피스의 래퍼 윌.아이.엠으로 분장해 화려한 댄스와 함께 수준급의 랩을 선보인다.

 

우주인이 쓰는 듯한 선글라스, 가죽 장갑 및 야광 팔찌까지 착용한 모습이 코믹함을 자아낸다.

 

그리고 양복 차림의 총장으로 돌아가 학생들과 ‘time of my life’를 마저 합창한다.

 

학자로서, 의사로서, 박애주의자로서, 세계은행의 새로운 총재로서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음악의 감성으로 교감하는 그의 모습이 소박하고 아름다워 보이기만 한다.

Posted by 파자마샘
일상의 기록2011. 7. 14. 16:37

 


다 좋아도 맞춤법 틀릴 땐 확 깨네…결혼해? 말아?

Q: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40살 남자친구가 있는 39살 미혼녀입니다. 서울의 4년제 대학 가정학과 출신이고, 출판사에서 일하다 요즘은 회사 사정도 안 좋고 결혼 계획도 있고 해서 그만뒀습니다. 남자친구는 수도권 소재 전문대학 졸업했고, 몇 군데 직장 다니고 사업도 두어번 하다 지금은 인터넷 설치 기사로 일한 지 5개월쯤 됐습니다.

막상 결혼을 생각해 보니 참 여러 가지가 걸리네요. 그다지 전망도 밝지 않고 월급 적은 직업도 그렇고요. 참, 그래도 성실해서 주공아파트 한 채 장만했고 빚은 없어요. 그 부분은 높이 사고 싶습니다. 제 고민은 가끔씩 깰 때가 있다는 겁니다. 문자나 메일을 주고받을 때 꼭 몇 군데씩 맞춤법이 틀려요. 미안한 말이지만, 무식해 보여서 있던 정도 확 떨어질 정도입니다. ‘전화할깨요’(전화할게요) ‘덧없이 기쁘죠’(더없이 기쁘죠) ‘만남을 같은 지’(만남을 가진 지) 같은 식이죠. 그래도 마음 추스르고 틀린 부분 고쳐주고 책 더 읽어야겠다고 하는 식으로 기분 나쁘지 않게 넘어가긴 해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거부감이 크게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더 노력하겠다고 하지만 전 쉽게 용납이 안 돼요. 제가 더 어렸으면 그만뒀겠죠. 학벌 차이나 작은 키는 감수해도 학식과 상식이 있는, 저만큼은 머리에 든 게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은데, 제 나이에 너무 큰 꿈인가요? 냉철한 조언 부탁드려요.


콩깍지도 안 씐 사람하고 결혼하려고?

A: 어떤 남자와 우연히 사랑하게 되어 결혼한다는 것은 “철쭉꽃이 만발했기에 고양이를 창밖으로 내보내는 것과 비슷한 논리적 과정”이라고 미국의 소설가 캐벌이 말했답니다. 맞춤녀씨, 무슨 이야기인지 좀 아리송하죠? 이 말을 다르게 풀어 보자면, 2+3=7인 게 틀린 답이 아니라 “오! 행운의 7이라니! 나는 참 운도 좋지!”라고 느껴지는 과정이 결혼이라는 거죠.

맞춤법이 눈에 거슬리는 건, 일종의 징후예요. 몇 년 전 영국 방송에서, ㄱ이라는 곳에서 ㄴ이라는 곳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공모한 적이 있었습니다. 1등상을 받은 답은 뭔 줄 아세요?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간다’였죠.

왜 그런 경험 있지 않아요? 불편하고 싫은 사람과 식사를 하면 아무리 산해진미여도 맛없게 느껴지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먹는 우동 한 그릇은 꿀맛인 경험. 맞춤녀씨는 미국 라스베이거스까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퍼스트클래스로 갈래요, 마음에 쏙 드는 사람과 이코노미클래스로 갈래요? 물론 마음에 쏙 드는 사람과 퍼스트클래스로 가면 금상첨화죠. 그렇지만 인생이 그런 기회 잘 안 준다는 거, 알잖아요.
어차피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에요. 선택은 둘 중 하나를 버리는 거랍니다. 학벌·키·지적수준·직업·인성·재산, 이 중에서 ‘이것만은 절대 버리지 못하겠는 것’은 뭔가요? 맞춤법 틀리는 그분이 인생에 ‘맞춤’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책 안 읽는 남자에게 책을 읽히고, 맞춤법 틀리는 남자 맞춤법 고쳐주는 것은 평강 공주 하나면 충분하답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장광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원하는 결혼은 하지 마세요’라는 거예요. 상대방에게 확신이 들어도 결혼하면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투성이인 게 결혼이죠.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결혼을 한다면 더욱더 힘들어질 게 뻔하니까요.

앞으론 누구든 그가 맞춤법을 틀린다면, 마음이 확 식는 게 아니라, 그 남자가 귀엽게 느껴져서 일부러 맞춤법을 틀리게 답문자를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결혼을 하세요. 덩달아 맞춤법을 틀려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당신은 틀림없이 누구에게도 질문하지 않는, 행복한 신부가 되어 있을 겁니다.

출처: 2011년 7월 14일  한겨레 특화섹션 매거진esc

Posted by 파자마샘
일상의 기록2011. 6. 26. 16:57

군웅할거·영웅탄생 … 관중 창조 비결은 끝없는 ‘천일야화’

프로야구를 국민 스포츠로 만드는 힘은?


 

롯데 팬들은 상대 투수가 견제구를 던질 때마다 “마!” 소리를 질러 투수를 압박한다. 지난 5월 사직야구장을 찾은 김정효 박사는 “수만 명이 일제히 일어나 ‘마!’를 외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프로야구가 후끈 달아올랐다. 지난해 600만 관중 돌파에 이어 올해는 시즌의 반도 지나기 전에 3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직장 동료끼리, 가족·친구·연인끼리 야구장에 가는 게 일상이 됐다.

출범 30년을 맞은 프로야구가 ‘국민 스포츠’가 된 이유는 뭘까. 야구에 빠져들게 만드는 스포츠로서의 본질적인 매력이 있을 것이다. 체육철학자인 김정효(47) 박사는 기호학적인 접근을 한다. ‘압구정동’이라는 말에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동’이라는 의미와 ‘한국 사회의 압축성장’이라는 상징이 함께 들어 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야구에 들어 있는 각종 기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캐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야구를 기호학으로 풀어보려는 여정에 이태일(46) 엔씨소프트 야구단 대표이사가 동행했다. 중앙일보 야구전문기자 출신인 이 대표는 30년 넘게 지켜온 야구 현장의 생생한 사례들을 풀어냈다. 서울 삼성동 엔씨소프트 사옥에서 열린 대담에서는 야구를 둘러싼 풍성한 담론이 펼쳐졌다.

페넌트레이스-이벤트의 일상화

이태일 엔씨소프트 야구단 대표이사

김 박사(이하 김): 프로야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생산해 내는 ‘서사 구조’를 갖고 있다. 프로야구는 ‘페넌트레이스’라는 시즌이 봄에서 가을까지 이어진다. 월요일을 빼고 매일 경기가 열린다. 이벤트의 일상화다. 프로야구 시즌 시작을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고 표현한다. 대장정은 영웅담이고 서사시와 같다. 군웅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모험과 대결이 있다. 무협지나 서사시는 완결된 구조에 허구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프로야구는 현실의 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다. 그 속에 드라마가 있다.

이 대표(이하 이): 매일 경기를 한다는 게 일상성을 만든다. 해가 떨어지면 야구를 보고, 아침에는 전날 경기 얘기를 하고, 오늘은 어떤 승부가 펼쳐질까 예상하고, 해가 떨어지면 또 야구를 보고…. 야구는 단막단막 끊어지는 연속극과 같다. 타자와 투수, 1회 초와 1회 말, 경기 대 경기, 시즌 대 시즌, 지난 30년의 역사가 연결된다. 30년 전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데려갔던 잠실야구장에 오늘 내가 아들을 데리고 가서 “얘야, 야구란 말이다”라며 얘기를 들려준다.

김: 프로야구는 일상의 밤의 문화를 지배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빠트릴 수 없는 게 스포츠 채널의 정착이다. 초창기 프로야구는 토·일요일 낮에만 중계됐다. 그나마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마친다’는 지상파의 폭력에 무방비로 당했다. 이제는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팀의 경기를 볼 수 있다. 매일 게임을 보고 팀에 몰두하면 야구가 전해 주는 메시지와 이야기성에 빠져들게 돼 있다.

이: 그렇게 된 건 얼마 전이다. 2005년 4월만 해도 3개 스포츠 채널에서 프로야구 중계는 한 경기밖에 없었다. 방송사가 ‘이건 사람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한 계기는 2006년 WBC였다. 콘텐트로서 경쟁력을 갖춘 게 몇 년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건 팬들의 동력 때문에 가능했다.

라이벌의 형성-갈등구조

김정효 박사 체육철학자

김: 서사 구조에는 갈등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프로야구는 이 갈등구조가 아주 잘 짜여 있다. 바로 라이벌이다. 예전에는 지역, 모기업 등 빤히 보이는 구도였다. SK가 들어오면서 다양한 구도가 만들어졌다. SK가 3년 정도 독주하면서 이를 견제하려는 전선이 형성됐다. 요즘은 넥센과 LG가 만나기만 하면 혈전을 벌인다.

이: SK는 LG와 ‘사람의 이동’을 둘러싼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김성근 감독, 민경삼 단장, 이상훈·김재현 등이 LG에서 SK로 옮겼다. 두산과 SK는 한국시리즈 등 포스트시즌에서 단골로 만나면서 ‘실력 라이벌’이 됐고, 이는 한국 프로야구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라이벌은 상대를 모욕하거나 폄하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인정하고 존중할 때 만들어진다. 9구단으로 출범하는 창원 다이노스는 지역 구도상 롯데와 숙명의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김: 프로야구의 라이벌 구도는 필연적으로 고교야구의 존재와 맞닿는다. 고교 시절 라이벌 팀이나 선수는 프로에 와서도 숙명적으로 만난다. 야구 생태계가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고교야구가 좀 더 활성화돼야 한다.

이: 고교야구의 키워드는 ‘청춘’이다. 프로야구는 ‘기성’이다. 청춘은 가치관과 비전을 형성하고 추억을 만드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다. 일본 고시엔 야구가 먹히는 것도 이런 청춘과 열정이라는 모티브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콘과 아이덴티티-팀 색깔

김: 서사 구조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인물의 성격이다. 프로야구가 30년을 내려오면서 팀의 성격이 만들어졌고, 이는 서사성을 강화시킨다. 그런데 막내 팀인 넥센은 아이콘이 아직 없다. 선수보다는 김시진 감독, 정민태 코치, 심지어 캐릭터 인형인 턱돌이가 더 부각됐다. 이대호-자이언츠(거인), 김동주-두목곰 등은 딱 떨어지는 아이콘이다.

이: 우리는 공룡이라는 아이콘을 통해 팀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가려고 한다. 프로야구 출범 때 ‘어린이에게 꿈을’이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전설 속의 동물인 공룡은 사람들에게 몽환적인 느낌, 잊고 살았던 꿈과 향수 등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어린이에게는 선망의 대상, 어른에게는 향수의 대상인 팀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경남 고성에는 공룡 발자국도 있다.

김: 팀 아이덴티티는 롯데가 가장 강력하다. 롯데의 응원문화는 부산이라는 지역공동체 의식이 조직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마!’ ‘쌔리라’는 지역 사투리인데 짧고 강하면서도 투쟁적이다. 지난달에 ‘마!’ 한번 하고 싶어서 사직에 갔다. 상대 투수가 견제구를 던지면 수만 명이 일제히 ‘마!’를 외치는데 소름이 쫙 돋았다. ‘마!’는 엄밀히 따지면 경기 방해 요소이자 홈 텃세다. 롯데 팬들은 ‘사직에 왔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생각한다. 관중이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경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주체가 된다. ‘쌔리라’는 번트나 볼넷 따위는 싫고 화끈한 공격야구를 하자는 의식의 표현이다. ‘아주라(파울볼 아이 줘라)’는 ‘파울볼을 애한테 주지 쩨쩨하게 그거 갖고 가서 뭐 할래’라는 지역정서를 나타낸다.

이: 롯데의 응원문화는 프로야구에 매우 유익하다. 그만큼 팬 충성도가 높다는 뜻이다. 롯데가 성적이 좋지 않을 때도 꾸준히 야구장을 지켰던 관중이 지금의 사직 100만 관중을 견인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큰 책임감을 느낀다. ‘우리가 야구 하니까 팬들은 당연히 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사이의 미학-상상력

김: 서사 구조는 이항대립적이다. 선과 악, 행운과 불운, 우연과 필연이 맞선다. 야구도 이항대립적 요소가 이어진다. 투수와 타자, 볼과 스트라이크, 세이프와 아웃, 이런 것들이 엮이면서 얘기를 만들어낸다. 야구는 모든 동작이 하나하나 끊어지고 다시 연결된다. 긴장과 이완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이의 미학’이다. 여기에 상상력이 끼어든다. 투수가 공을 던지기 직전 ‘바깥으로 하나 뺄 거야’ ‘인코스 뚝 떨어지는 것 던지겠지’ 등 상상을 한다. 원아웃 1, 2루에서 공격팀은 싹쓸이 2루타, 수비팀은 더블플레이처럼 각자 최상의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이: 사이의 미학이라는 표현이 좋다. 팬들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동안에 TV 중계에서는 해설자의 내러티브가 이어진다. 전문가의 상상력이다. 이런 상상력 속에서 풍부한 알레고리가 탄생했다. ‘야구는 9회 말 투 아웃부터’ ‘위기 뒤에 찬스’ 같은 표현이다. 이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반영한다.

김: 야구의 또 다른 특성은 임장성(臨場性)이다. 야구장에 가서 생생하게 현장을 느끼고, 그 드라마의 순간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TV로 야구를 볼 수도 있지만 ‘마!’ 소리를 지르고, 좋아하는 선수의 피켓을 흔드는 건 현장에 가서야 의미가 있다.

이: 프로야구가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찬스 뒤에 위기’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가장 인기 있던 스포츠가 하루아침에 몰락한 사례도 있다. 스포츠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는 데 충실해야 한다. 프로야구가 지금까지 유지해 온 깨끗함·공정함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나만 살아야겠다’는 구단 이기주의를 벗어나 동업자정신을 가질 때 프로야구는 더 발전할 수 있다.

출처: 2011년 6월 26일 중앙선데이

Posted by 파자마샘
일상의 기록2010. 4. 27. 09:59


출근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막 닫히려는데 10미터쯤 앞에 다가오고 있는 사람이 있어 열림 버튼을 눌러

기다려줬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 사람은 먼저 내리고 혼자 남겨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열림과 닫힘 버튼을

눈여겨 보니 닫힘 버튼의 페인트는 완전히 닳아 없어진 반면 열림 버튼은 새 것처럼 페인트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 시대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 문을 닫는 것에는 익숙하고 이를 재촉하지만

남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고 인색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에 남겨진 흔적처럼 내 자신 어딘가에도 배려 또는 무관심의 흔적이 쌓여가고 있음을

명심할 수 있기를...    
Posted by 파자마샘
일상의 기록2010. 4. 16. 10:26



스무 살 무렵,
너무 충동적이어서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그 때,
길거리에서 친구를 ‘버린’ 적이 있다.

탑골공원 앞,
앞서 걷고 있던 친구 뒤에서 순간 걸음을 멈추고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날 친구는 종로 바닥을 몽땅 뒤지며 나를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조차 받지 않으며
그렇게 한참 몇 개월을 그 아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시와 여행을 좋아했던 그 친구는
거칠 것 없는 솔직함으로 사람들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 아이가 내게는 마치 4차원에서 온 것 마냥 신기했었고
그렇게 시작된 호기심으로 그 아이와 친구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날은 긴 머리카락으로 인사동 거리를 활보하던 네가
사람들의 너무 많은 주목을 받았고 그 옆의 내게로까지 옮겨온 시선이
나로선 너무 벅찼던 게 보잘것없는 이유라면 이유였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네 특별함에 기대어
나도 같이 특별해지고 싶었던 마음을
그 날 스스로에게 들켜버린 게 창피해
순간적으로 숨고 싶었던 거라 고백한다면
내 변덕이 너무 심했다 이제와 늦게라도 원망해올까.

막연한 동경(憧憬)만으로 누군가의 곁에 머무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한 것인지 모른다.

항상 남들과는 다르고 싶었던 내 조바심이
특별한 무언가, 특별한 누군가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냈던 거라면
그 조바심에 호흡이 가빠지는 건 결국 ‘나’란 사실을 지금은 안다.
‘특별’하다는 건 누군가에게 기대어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널 버렸던 그 거리의 나는 알지 못했다.

지하철 역에서 날 기다리며 노오란 프리지아 한 다발과
조병화 시집을 건네주었던 그 친구가
처음 기타를 배울 때 쳤다며 기념으로 내게 주었던 연두색 피크(pick)가
얼마 전 책장 정리 중에 그 조병화 시집 안에서 나왔다.

이십 대가 슬그머니 가버린 것처럼
강렬했던 느낌만 남기고 지금은 내 옆에 없는 너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네가 치는 기타소리를 들으며
조병화 시인의 시집을 소리 내어 들려주고 싶다...

글/사진 정윤선
(출처: 엔크린 모닝커피)
Posted by 파자마샘
일상의 기록2010. 3. 31. 20:53
UDT(해군특수전여단)·53세·준위. 군대 갔다온 사람이면 이 세 단어의 무게를 다 안다. 분명 고(故) 한주호 준위는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됐다. ‘UDT의 전설’로 존경 받으며 느긋한 말년을 누릴 위치였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해군의 명예를 건지려 물에 뛰어들었을 게 분명하다. 누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그 전날 인터넷엔 이런 글이 올랐다. “내가 다이빙을 잘 아는데 아무리 파도가 거세도 막상 물에 들어가면 잠잠하다.” 이 네티즌은 “차라리 우리 동호회 멤버들이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비아냥거렸다. 수많은 댓글이 꼬리를 물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온 국민이 알도록 퍼나릅니다”….

이 네티즌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2004년 3월 19일자 중앙일보 기사가 있다. “해저 308m 잠수 기록을 가진 세계 최고의 테크니컬 스쿠버다이버가 우리 서해에서 잠수 도중 사라졌다. ‘물고기 인간’ 존 베넷(44·영국)의 실종 장소는 전북 부안군 상왕등도 인근 앞바다. 64m 아래 침몰한 외국 화물선을 조사하러 들어간 베넷은 서해의 강한 물살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물속 시계도 2m밖에 안 돼 사흘째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시신은 영원히 찾지 못했다. 백령도 바다는 더 험하다. 다이버 동호회의 놀이터가 아니다.

대엿새 동안 인터넷을 보면서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드라마 ‘아이리스’의 끝물인지 온갖 음모론이 난무한다. 아군끼리 오폭(誤爆)했다는 ‘팀킬’에서 청와대가 주범이라는 막가파식 시나리오까지 나돈다. 그제 이명박 대통령이 백령도를 방문하자 이런 댓글까지 붙었다. “범인은 범행 현장에 반드시 다시 온다.” 요즘 자칭 ‘천안함을 탔던 예비역’이란 네티즌은 왜 그리 많은가. 아이디로 미뤄 보면 여성으로 보이는 글도 적지 않다. 야당도 덩달아 신이 났다.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라디오에서 “아버님, 지금 비상이니 나중에 전화하겠습니다”라고 통화했다는 실종자 가족의 증언을 소개하며 “모종의 작전을 진행하다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경이 공개한 구조 비디오를 보면 한마디로 황당한 시나리오다. 전투위치에 배치됐어야 할 병사들이 어떻게 속옷 차림으로 탈출하는가.

미국의 9·11 테러 때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영웅이었다. 흙 묻은 구두와 땀에 찌든 양복 차림으로 41차례나 폐허 위에 섰다. “내일도 뉴욕은 이 자리에 있을 겁니다. 우리는 무너진 자리를 다시 세울 겁니다.” 그의 외침은 미국을 안도시켰다. 그러나 정말 진정한 영웅은 뉴욕 시민들이었다. 첨단 유전자 감식 기술을 총동원했으나 결국 1164명(희생자의 42%)의 유해는 한 조각도 찾지 못했다. 건물 잔해와 뒤섞여 매립지에 버려졌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도 뉴욕시민들은 참았다. 추도식은 희생자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그라운드 제로에 조용히 꽃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했다. 대참사 앞에서 그들은 단결했다.

왜 우리는 서로 물어뜯는가. 광우병 파동 때는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 전문가로, 황우석 사건에는 배반포까지 외워가며 치고받았다. 이제는 해군 전문가로 변신해 싸우는 중이다. 기뢰·폭뢰·어뢰 구분은 이미 상식이고, 버블제트 효과쯤은 줄줄 외워야 한다. 천안함 절단면이 깨끗하다는 소식이 나오자 갑자기 인터넷에선 기뢰설(說)이 침몰하고 선박 노후화에 따른 피로 파괴설이 급부상했다. 서로 거품을 물고 싸운다. 이러다간 천안함 대신 나라 전체가 두 동강 나 가라앉을 판이다.

어차피 정확한 침몰 원인은 선박 인양 이후에야 속 시원히 가려질 일이다. 군의 초동 대응이 훌륭했다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대놓고 타박하는 것도 지나치다. 뉴욕 시민들은 자욱한 테러 먼지가 가라앉은 뒤에야 수습 때의 문제를 따지기 시작했다. 지금 그나마 믿고 의지할 곳은 해군밖에 없다. 한 준위의 숭고한 희생을 보면서 말을 아끼고 지켜볼 때다. 그러나 겁난다. 아마 이 글이 읽힐 때쯤 인터넷에선 ‘천안함을 만든 사람입니다’라는 네티즌끼리 서로 물어뜯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 철호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378/4089378.html?ctg=2002)
Posted by 파자마샘
일상의 기록2009. 5. 14. 07:38

하버드대생 268명 72년간 인생추적

'그는 하버드대의 수재였다. 아버지는 부유한 의사, 어머니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었고, 판단력이 뛰어났다. 이상도 높았고 건강했다. 그러나 31세에 부모와 세상에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돌연 잠적하더니 마약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망했다. '전쟁 영웅이었고 평화운동가였다'는 부음기사가 나갔다.' (141번 사례)

'활발하던 한 학생은 결혼 후 세 아이를 낳고 이혼했다. 동성애 인권운동가가 됐다. 삶에 더 남은 것이 없다며 술에 빠져 살다가 64세에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47번 사례)

1937년 미국 하버드대 남학생 268명이 인생사례 연구를 위해 선발됐다. 세계 최고의 대학에 입학한 수재 중에서도 가장 똑똑하고 야심만만하고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이들이었다. 후에 제35대 미국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Kennedy),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으로서 닉슨의 워터게이트사건 보도를 총괄 지휘했던 벤 브래들리(Bradlee·현재 부사장)도 끼어 있었다.

당시 2학년생으로 전도유망했던 하버드생들의 일생을 72년에 걸쳐 추적한 결과가 12일 시사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 6월호에 공개됐다. 1967년부터 이 연구를 주도해온 하버드 의대 정신과의 조지 베일런트(Vaillant) 교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결론지었다.

연구결과 47세 무렵까지 형성돼 있는 인간관계가 이후 생애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안정적인 성공을 이뤘다. 연구 대상자의 약 3분의 1은 정신질환도 한때 겪었다. "하버드 엘리트라는 껍데기 아래엔 고통받는 심장이 있었다"고 잡지는 표현했다. 행복하게 늙어가는 데 필요한 요소는 7가지로 추려졌다. 고통에 적응하는 '성숙한 자세'가 첫째였고, 교육·안정적 결혼·금연·금주·운동·적당한 체중이 필요했다.

베일런트 교수는 "어떠한 데이터로도 밝혀낼 수 없는 극적인 주파수를 발산하는 것이 삶"이라며 "과학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숫자로 말하기엔 너무나 아름답고, 학술지에만 실리기에는 영원하다"고 말했다.

◆ 금연·운동 등 7대 요소중 5가지 이상 갖춘 106명은 80세에도 절반이 행복

특정 개인의 역사를 장기적으로 추적한 '종적(縱的) 연구'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하버드대 2학년생 268명 생애 연구'는 1937년 당시 하버드 의대 교수 알리 복(Bock)이 시동을 걸었다. 연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한 백화점 재벌 W T 그랜트(Grant)의 이름을 따 '그랜트 연구'라고도 불린다.

연구는 "잘 사는 삶에 일정한 공식이 있을까"라는 기본적인 의문에서 출발했다. 연구진에는 하버드대 생리학·약학·인류학·심리학 분야의 최고 두뇌들이 동원됐다. 이들은 정기적인 인터뷰와 설문을 통해 대상자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체크했다.

268명 대상자 중 절반 정도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남은 이들도 80대, 90대에 이르렀다. 지난 42년 간 이 연구를 진행해온 조지 베일런트(Vaillant) 교수는 대상자들의 행적이 담긴 파일을 소개하며 "기쁨과 비탄은 섬세하게 직조(織造)돼 있다"는 윌리엄 블레이크(Blake·1757~1827)의 시구를 인용했다.

최고 엘리트답게 그들의 출발은 상쾌했다. 연방상원의원에 도전한 사람이 4명이었고 대통령도 나왔다. 유명한 소설가도 있었다. 그러나 연구 시작 후 10년이 지난 1948년 즈음부터 20명이 심각한 정신 질환을 호소했다. 50세 무렵엔 약 3분의 1이 한때 정신질환을 앓았다.

행복하게 나이가 들어가는데 필요한 '행복 요소' 7가지 중, 50세에 5~6개를 갖춘 106명 중 절반이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고 있었다. '불행하고 아픈' 이들은 7.5%에 그쳤다. 반면 50세에 3개 이하를 갖춘 이들 중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개 이하의 요소를 갖춘 사람은 그 이상을 갖춘 사람보다 80세 이전에 사망할 확률이 3배 높았다.

50세 때 콜레스테롤 수치는 장수(長壽)와 무관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콜레스테롤 수치가 중요한 시기가 있고 무시해야 할 시기가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어릴 적 성격도 장기적으로는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수줍음을 타던 어린이가 청년기에는 고전하더라도 70세에는 외향적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았다. 대학교 때의 꾸준한 운동은 그 후 삶의 신체적 건강보다는 정신적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성공적인 노후로 이끄는 열쇠는 지성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적성, 즉 인간관계였다. 형제·자매 관계도 중요하다. 65세에 잘 살고 있는 사람의 93%가 이전에 형제·자매와 원만하게 지낸 사람들이었다.

인간의 기억이 나이가 들어가며 왜곡되는 모습도 보여줬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들 중 34%가 1946년에 "적군의 포탄 아래 놓여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25%는 "적군을 죽여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42년 후인 1988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포탄 아래 놓여봤다"는 답변자는 40%로 늘었고, "죽여봤다"는 답변은 14%로 줄었다.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모험성은 첨가되고 치명적 위험성은 약화되는 쪽으로 왜곡된다"는 것이 베일런트 박사의 진단이다.

한편,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Brooks)는 "이번 연구는 대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상상력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소설 같은 삶이 현실에도 존재함을 보여준다"며, "과학의 잣대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삶은 미묘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평했다.

출처: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14/2009051400144.html?Dep0=chosunmain&Dep1=news&Dep2=headline1&Dep3=h1_04

Posted by 파자마샘
일상의 기록2009. 5. 11. 22:37

"예약 하셨어요? 안 하셨으면 한… 두 시간 쯤 기다리셔야 해요."

기가 찼다. 내로라하는 힙 플레이스도(hip place, 최신 유행 공간) 아닌 동네 가게에서 어색하게 무슨 예약? 당황스러운 표정을 읽었을까. 대기자 리스트를 보여준다. 수 십개로 쪼개놓은 칸마다 예약 손님의 이름이 빽빽하다.

지난 연휴, 네일숍을 찾았다.

'개발에 편자다' 생각하며 주저하다 나선 길이다. 가방에 노트북, 카메라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빛처럼 빠른 스피드로 타이핑하다 보면 매니큐어 칠은 며칠을 못 간다. 그런데도 그 '비경제적인 활동'을 하러 간 건 가까이 지내는 한 연예기획사 대표의 말 때문이었다.

연예인 관리가 철저하기로 소문난 A대표는 외신을 인용해 미국 유명 기업의 비서 채용 일화를 전했다.

젊은 여성들이 선망하는 일자리, 지성과 미모를 갖춘 쟁쟁한 후보들이 몰렸다. 최후에 웃은 건 의외로 평범한 외모의 후보자였다. 후일담을 들어보니 인사담당자가 주목한 건 찻잔을 쥔 그녀의 손톱. 단정하고도 우아한 컬러로 잘 관리된 손톱이 신뢰를 줬다고 한다. 프로에게 요구되는 자기 관리 능력과 섬세함이 빛났다나.

말 끝에 내 손을 내려다 본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군인처럼 짧은 손톱, 군데 군데엔 거스러미까지. A대표는 "그 면접을 봤다면 당신은 볼 것도 없이 낙방"이라고 했다.

비서 될 일이야 없을테지만, 기자는 사람 만나 악수할 일 많은 직업 아닌가. 거친 손을 반성했다. 황금 같은 휴일, 두 시간을 버려가며 손톱에 충성한 이유다.

관리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각질 벗기고 컬러를 입혀주는 기본관리가 보통 2만원. 발톱 관리엔 그 두 배를 받는다. 그라데이션이나 반짝이를 붙이는 '아트 작업'이 들어가면 비용은 껑충 뛴다.

그런데도 '언니'들은 쉼 없이 찾아와 두 말 없이 지갑을 열었다. 두 평 남짓 네일숍엔 주중 스무 명, 주말에는 마흔 명 이상의 손님이 다녀간다고 했다. 대개 10만원, 20만원 단위로 쿠폰을 끊고 들르는 단골들이다.




소규모 동네 숍에서도 딱딱 정해진 날짜에 손톱 보살피러 오는 손님이 일 주일이면 수 백 명. 더 놀라운 건 수익 규모였다. 편차가 있겠으나 미용실 등에 숍인숍 형태로 자리한 곳은 월평균 1천500만원에서 2천만원, 단독 숍은 약 2천500만원에서 많게는 4천만원까지 매출을 올린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국내에만 150여개, 중국에도 100개에 이르는 숍을 가진 프랜차이즈 네일숍은 지난해 매출이 350억원에 이른다.

사실 미용산업의 성장은 우리가 먹고살 만 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 이상일 때에야 비로소 머리 손질에 눈을 돌릴 여유가 생긴다. 좀 더 형편이 나아지면 화장품 산업이 성장한다. 네일산업은 그 단계를 넘어서야 큰다. 적어도 국민소득 2만달러 이상인 나라에서나 손톱관리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다. 네일산업이 미용의 꽃으로 불리는 이유다.

한국은 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노무현 정부 시절에 이르러 국민소득 2만달러를 기록했다. 청담동에 '미용실 애비뉴'가 조성된지 오래이니 네일산업도 그 성장의 열매을 맛봤을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건 현 상황이다. 지난해 이후 경제 상황이 크게 나빠졌다. 네일산업은 거기서 예외다. 왜일까.

업계에선 불황 속 네일산업이 홀로 웃는 비결을 다시 '불황'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고용불안 속에서 잇 백(it bag·유행하는 가방)이나 새 옷, 신상 구두를 사들이기 겁나는 지금, 언니들이 상큼한 컬러의 립스틱에서 희열을 느끼듯 손톱 만큼의 사치에 열광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네일리스트들은 "손톱관리를 받고 돌아가는 언니들의 표정을 보라"고 했다.

통잔 잔고를 크게 축내지 않으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 30분만 투자하면 고르는 색깔을 따라 기분을 싹 바꿔주는 영리한 서비스. 네일산업은 언니들의 불황기 대체재인 동시에 꽤 합리적인 자기관리의 방식이었다.

여기까지 참견하고 반짝반짝 마무리 된 내 손톱을 본다. 씨익. 기분 제법 괜찮은걸. 이 기분 못 잊는 언니들 덕에 손톱만큼의 사치가 이룬 산업 규모가 벌써 3천억원이란다. 컥.(용품산업 제외 · 한국네일협회)

출처: <아이뉴스24> 박연미 기자 http://it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413519&g_menu=022600&pay_news=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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